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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수학

침착하고 말이 없던 소년, 뉴턴

by 북폴라리스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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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5년~1666년, 창조적 휴가

1642년 태어난 뉴턴은 갓난아기 때부터 미숙하고 허약했습니다.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혼자 농장을 운영하느라 바빴기에 그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뉴턴은 아주 평범한 시골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족의 지원으로 166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가서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여기서 마침내 뉴턴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및 갈릴레오의 저작들을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뉴턴은 대학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는데, 특히 기하하학에 어려움을 느껴서 전공을 과학에서 법학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 명의 훌륭한 스승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이작 배로우(Isaac Barrow)입니다. 

 

뉴턴이 학부 과정을 마친 시점에 흑사병이 돌아 대학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케임브리지에 흑사병이 덮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뉴턴은 1665년과 1666년을 울스토르프에 있는 고향 집에서 지내며 과학과 수학을 깊게 파고들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뉴턴은 역학, 수학 및 광학에서 위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는 중력의 법칙이 역학의 광범위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미적분의 문제들을 다룰 일반적인 방법도 알아냅니다. 뉴턴은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염병이 돌던 1665년과 1666년 두 해에 걸쳐 일어났다.
당시 나는 창의성의 절정에 있었으며, 수학과 철학[과학]에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을 쏟았다.

 

플라톤은 내 친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내 친구다. 하지만 진리야말로 누구보다 내 최고의 친구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갔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선임 연구원이 됩니다. 1669년 그의 스승인 아이작 배로우가 신학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수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뉴턴이 후임을 맡았습니다. 뉴턴은 훌륭한 교사는 아니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학생이 거의 없었으며 뉴턴이 제시하는 내용의 독창성을 알아봐 주는 학생이 없었다고 합니다.

 

뉴턴은 1672년 빛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후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뉴턴은 개인적으로 중력에 관한 아이디어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1684년 친구이자 천문학자 인 에드먼드 핼리는 그에게 연구 결과를 발표하라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연구에는 한 가지 기술적인 장애가 있었습니다. 바로 행성의 운동 모형을 만들 때, 행성들을 질량은 있지만 크기는 0인 하나의 점 입자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뉴턴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염려했습니다. 뉴턴은 이 비현실적인 점을 입체 구로 바꾸고 싶었지만, 구의 중력이 동일한 질량의 점 입자의 중력과 똑같음을 증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686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고, 다음 해인 1687년 마침내 과학의 고전인 「프린키피아」가 출간됩니다.

 

이 책에는 새로운 개념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갈릴레오의 연구를 확장시켜 얻은 운동에 관한 수학적 법칙 그리고 케플러가 발견한 법칙에 바탕을 둔 중력 이론입니다.  「프린키피아」는  많은 갈채를 받았으며, 세 가지 라틴어 판본 외에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프린키피아」는 유클리드의 연역적 방식에 따라 서술되어 있습니다. 즉, 정의, 공리 및 수백 가지의 정리와 결과들을 담고 있습니다. 간결한 표현으로 되어 있어 읽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 대해 뉴턴은 친구에게 변명하면서 자신은  「프린키피아」를 일부러 어렵게 만들었노라고 터놓습니다. "수학을 겉핥기로 아는 이들한테서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라며, 이전에 빛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을 때 당했던 비판을 더 이상 겪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화학을 포함하여 약 삼십 년 간의 창조적인 활동을 마친 후 뉴턴은 좌절을 느꼈고 신경쇠약을 앓았습니다. 1696년에는 영국 화폐주조국 국장을 맡았으며 이후로는 신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뉴턴의 집

뉴턴, 라이프니츠 누가 먼저인가?

뉴턴은 1665년부터 미적분을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1687년 전까지는 이 주제에 관해 어떤 내용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으로 보면 뉴턴의 개념과 대동소이했던 라이프니츠는 1673년부터 미적분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1684년 이 주제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둘은 독자적으로 연구했지만, 아마도 라이프니츠가 1672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와 1673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 뉴턴의 연구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1684년에 발표하자, 뉴턴의 친구 몇 명은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마침내 친구들은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비난했고 베르누이는 라이프니츠를 변호하게 됩니다. 베르누이는 표절한 쪽은 라이프니츠가 아니라 뉴턴이라고 맞받아졌습니다. 사실, 둘의 미발표 원거가 보여주듯이 두 사람은 각자 독자적으로 미적분학을 발견했습니다. 혼란을 더 가중시킨 것은, 둘이 아이작 배로우의 이전 연구에 심하게 의존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더 억울한 쪽은 두 사람보다는 배로우이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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